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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공경과 여호와 경외 (5월10일 녹취록)

20. 5-10 (어버이 주일)

 

 

부모 공경과 여호와 경외

엡 6:1-3 어버이 노래

 

 

사람에게는 생존이 제일 중요해요. 생존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변해요. 또 생존의 방식이 변하면서 가족 제도나 모든 것이 변해요.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변하면 우리의 삶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 풍요로움이 우리에게 행복이 되지 못하고, 그 풍요로움이 우리의 삶에 생명을 더 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치 수학에서 공식이나 구구단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어떻게 더 잘 살까만 생각하는데, 교회에 와서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진리인 성경이 말하는 변하지 맑아야 한 가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라.”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변하면 우리의 삶에 행복이 없어집니다.

우리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형태는 시대를 따라서 달라지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어떤 가정 형태에서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오늘 그것을 말씀을 드릴 거예요.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제일 처음에는 수렵채취 시대였어요. 동물을 잡아먹고 과일 따 먹고 살다가 농경 시대가 왔습니다. 이 농경시대로 거의 17세기 18세기까지 쭉 살아왔어요. 농경시대나 수렵체취시대에는 가정이 대가족제도이었어야 돼요. 가족이 많아야 잘 살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동물을 못 잡잖아요? 누군가가의 도움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가족이 많으면 동물을 잡을 확률도 높았고요. 채취를 할 때에도 많은 가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농경 시대에도 가족이 많아야 살아가기가 편했니다. 그래서 대가족을 이루었던 겁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골 초등학교는 봄, 가을 모내기철이나 추수 때는 초등학생들에게도 분기 방학을 했어요. 모내기 할 때에 못 줄을 잡아 주기도 했고, 추수할 때에는 볏단 나르기도 했습니다.

대가족제도라는 것은 그냥 대가족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제도 였고, 자식이 많으면 자식이 적은 가정보다 부자 될 확률이 많았기 때문에 자식 많은 가족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계몽주의가 시작이 되고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시대로 변화 된 겁니다.

 

농경시대까지만 해도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더 잘 살았습니다. 그러데 산업화를 서양이 먼저 이루었다고요. 그때부터 서양이 동양을 앞지르는 선진국이 된 겁니다. 산업화가 되면서 생산량이 굉장히 많아졌고, 사람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 거예요. 모내기도 이양기로 하고, 추수도 기계가 대신 합니다. 이런 시대가 불과 오래 되지 않았어요. 사람보다 기계가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에 생산량이 엄청 많아졌어요. 그러나 한 가지 아셔야 되는 것이 그렇게 생산량은 많아졌는데 인간의 삶은 피폐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사람은 생산에서 기능인 몇 명만 필요했고, 많은 사람은 소비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대가족이 되면 가난하게 될 확률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많으면 거지 꼴 못 면한다고 점점 핵가족화 된 거예요.

그렇게 핵가족화 되는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뭐냐면, 특히 계몽주의 이후에 여호와 경외 신앙이 사람들에게 사라지게 됐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것이 없어진 결과, 인간성이 황폐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서양에서는 산업화로 인하여 굉장히 잘 살게 되었지만 인간성이 황폐하게 되어서 공멸로 나가는 걸 보면서 고민을 하기를 시작해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한국의 문제가 선진 문화라고 서양을 본 받으면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산업시대의 유학은 선진 사회인 미국이나 유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들의 산업화된 것만을 배워 오는 것은 좋은데 비판적으로 배워왔어야 되요. 그 비판은 산업화가 가져온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고 그런 것들은 배격해야 되는데, 무조건 그런 것들을 추종하고 가져왔던 거예요.

 

산업화로 인하여 서양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지금 케네디를 굉장히 좋은 대통령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적으로 오면 굉장히 나쁜 대통령 중에 하나예요. 왜냐하면 그가 미국 학교 교육에서 성경을 교과목으로 가르치던 것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고요.

캐네디 교육 이후에 미국은 어떻게 됐는가? 학교에 총기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많은 문제점이 발생한 거예요. 미국의 많은 주에서 이런 것에 대하여 반성해서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한 비판 없이 미국을 추종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이런 비판적 시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축복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많은 사건이 있지만 한마디로 성경을 요약한다면, 전도서에도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일의 결국을 들었지만 사람의 본분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날 교회가 왜 세상에 소금이 되지 못하고 빛이 되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가? 신앙생활에서 왜 종교적 의무감만 가지고, 죄책감으로 인하여 종교생활을 하게 하는가?

여호와 경외의 신앙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여러분들에게 설교할 때에 계몽주의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장미 빛 인간에게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6.25 동란, 월남전을 겪으면서 서양의 정신세계는 패닉에 빠졌다 그랬지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히피문화, 자연으로 돌아가자, 히피문화의 정신은 자연으로 돌아 가자만이 아니고 무소유라고 했지요. 그래봐야 진정한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각이 생겼다고 했지요. 그런 성경공부를 수입해 온 것이 한국교회의 제자 훈련이었다고요.

그럴 때에도 성경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지 않는가? 그저 교회 성장의 수단이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신천지가 판을 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이런 생각합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이 어버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어른과 부모님에 대한 공경의 마음입니다

김누리 교수도 이야기 했지만 산업화가 되면서 교육이란 게, 사람의 스펙을 쌓는 교육이 됐다고요. 저는 김누리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스펙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어요. 김누리 교수는, 스펙은 어떤 무기의 사양, 무기의 재원을 말하는 거래요. 이 무기는 몇 미터 날아가서 폭발력이 얼마이기 때문에 얼마를 죽일 수 있다. 또 기계의 사용설명서라고 해요. 산업화 이후 사람 사용설명서의 교육, 사람을 그런 스펙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성이 말살된 것예요?

그런 산업화시대에서 지금은 정보화시대로 넘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스펙 교육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몰라요.

농경시대에는 동양이 더 잘 살았지만 이제까지는 산업화를 먼저 이끈 서양이 선진국이 되어 더 잘 살았지만, 정보화시대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서양을 앞서고 있는 것을 코로나 19가 증명해 주지요.

그런 거 보지 못하고, 그저 문재인이 잘 한다고 민주당을 찍는다면 정말 아이에게 키스하지 않고 요람에게 하는 거 하고 같다고 봐요. 민주당 찍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방식이 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앞으로 잘 살게 될 거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정보화 시대에 우리 대한민국이 정말 행복해지려면 목사님들이 정신 차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정신 차려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과 부모를 공경하는 신앙을 가지지 아니하면 우리가 서양을 앞질러서 잘 살게 되어도 인간성은 철저히 황폐화 되어서 정말 어렵게 된다고요. 그런 것들이 이번 이태원클럽에서 사건으로도 여실히 보여준다고요. 외국인이 우리를 평가할 때 극도의 개인주의와 일상의 사막화라고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뭐냐? 거저 전화 하면서 할렐루야를 먼저 외치고, 교회에 와서 아멘하고, 찬양을 뜨겁게 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라 하면, 종교로서의 기독교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의 경외함을 아셔야 된다고요.

어버이날 저에게 카톡으로 시골에 걸린 플랜카드의 내용들을 찍어서 보냈더라고요. 이런 플래카드를 붙여 놨더라고요.

“아들아 너 바쁠 것 같아 알아서 샀다. 입금해라. 고맙다.”

“꽃으로 퉁 칠 생각하지 마라.”

“꽃만 받고 끝내기는 내가 너무 정성으로 너를 키웠다.”

여러분 우리 부모님은 그런 부모님이 아니지요. 용돈 드리고 선물 사드리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가 아니에요. 전부 물신주의로 생각하는 거요. 우리가 서양을 비판하지 않고 받아드렸기 때문에 우리 한국은 극도의 개인주의와 일상의 사막화의 삶이 되었고, 이렇게 산업화되어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는 거에요. 이제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면서 서양이 우리를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그런 때가 와도,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더 피폐해질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중요해요. 교회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목사님들이 그만큼 각성하고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저는 목회하면서 제일 힘든 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적 신앙관을 깨뜨리는 게 제일 힘들어요. 그래서 차라리 우리 교회 와서 예수 처음 믿는 사람이 훨씬 더 편해요. 지울 게 없기 때문이지요. 그보다 더 편한 사람은 자기의 과거 신앙이 잘못된 것을 복음 안에서 깨닫는 사람은 더 편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여호와 신앙이 뭔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창조 신학이라고... 서양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계몽주의가 창조 신학을 배격했기 때문이거든요. 모든 신학의 기초는 창조 신학에서부터 출발 되었어요. 창조 신학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함이고 부모를 공경함이에요. 그런 창조신학을 기복신학으로 전부 대체해 버렸잖아요?

우리 교회에서 몇 차례 설교 했지만 이것은 계속 죽을 때까지 반복할 거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모세오경이고, 성경의 헌법이에요.

그런데 모세오경을 보면서, 봐라 야곱은 하나님 잘 믿어서 복 받았다. 요셉은 하나님 잘 믿어서 복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전부 우상 신학이고, 왜곡된 신앙이에요. 여러분 야곱을 눈 씻고 제대로 한번 보세요? 비판적인 눈으로 성경을 제대로 보면서 설교를 판단해 보세요.

야곱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는 바로 앞에서 뭐 라는가 하면, “내 나이 140 년인데 험악한 세상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목사님들의 설교가 야곱 같이 험악한 세상을 살도록 만든다고요.

요셉도 한번 보세요! 노예로 팔려가서 죽도록 고생한 삶이잖아요. 그 삶 살라는 거예요.

요셉과 같이 복 받아라. 야곱같이 복 받아라 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 속에 있는 창조 신학을 본 받아 라는 말로 이해해야 된다고요. 험한 세상 속에 야곱과 요셉은 어떤 다른 삶을 살았는가?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참 잘 생겼어요! 오늘날로 치면 미스코리아 정도 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이름도 사래는 나의 공주 이런 말이에요. 히브리어의 임은 소유격이에요. 임을 빼버리면 사라가 되잖아요? 그러면 그냥 공주, 열국의 어미 이런 말이 돼요.

아브라함이 보기에는 자기 아내 사래가 너무나 예쁘니까, 먹고 살기 힘들어서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뭐라는 가면, 이 이방 땅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너 뺏어 가려고 나를 죽일까 두렵다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남의 좋은 것을 빼앗으려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이지요. 그게 세상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번 보세요? 자기가 살려고 남 죽이는 것이 세상이잖아요? 그런 것이 오늘 날 산업재해잖아요. 비용 아끼려고 사람을 죽이는 산업현장 아니에요? 이런 것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산업재해를 보면서 성경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지 아니하면 주인 욕만 하고 말고, 노사 분규만 생긴다고요. 올바른 반성이 일어나지 않는다고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상은 사람을 스펙으로 가치평가해요.

 

요셉도 한번 보세요? 요셉은 트라우마가 많은 사람입니다. 믿었던 형님들에게 노예로 팔려 갔어요. 그것도 죽이려고 하다가 겨우 팔려갔어요. 그것도 어릴 때에 청소년기니까 얼마나 그에게 트라우마가 컷겠어요?

요셉이 어떻게 트라우마를 극복했는가? 여호와 경외의 신앙이었어요. 트라우마를 극복한 요셉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이런 것들을 설교하는 것을 안 들어 보았잖아요? 왜? 창조 신학이 뭔지 모르고, 기복신앙에 매여 있기 때문이에요.

요셉은 믿었던 형님들, 그 형님들에게 도시락 갖다 주러 갔다가 형님들에 의해서 노에로 팔려가 버렸다고요.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어요. 감옥에 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자기 형님들이 자기 발 앞에 지금 엎드려 있어요. 우리에게 그런 말이 있잖아요?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 해도 맞은 놈은 기억한다고. 형들은 요셉의 얼굴을 몰랐어요. 그러나 맞은 요셉은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으면 형들이 엎드렸을 때 알아 봤다고요.

그런데 그런 요셉이 하는 말이 뭔 줄 아세요?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기 때문에 당신들은 생명을 보존하게 될 거다.” 라고 합니다. 이게 창조 신학이에요.

여러분들이 진짜로 구원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신앙은 여호와 경외의 신앙이냐, 아니냐? 이에요.

여러분들 속에 트라우마가 있잖아요?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잘못 했던 사람들, 평생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 이름들, 그 사람이 내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보복 하지 않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천국가요.

 

제가 지난 주에도 설교했잖아요. 힘은 전쟁을 위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가져야 된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성령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인데도, 엑스타시 현상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는다고 하는 도깨비 신앙, 귀신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한국 교회가 엉망진창이라는 거지요.

요셉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때문에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형들에게 생명을 보존하게 될거다.” 이래요. 오늘 코로나 19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이 빚을 발하려고 하면 이 창조신학에 있어야 해요.

 

출애굽기에도 보면, 바로가 히브리산파에게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들은 낳는 즉시 다 죽여 버려라.”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는데,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는 뭐라는 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을 살렸다.”고 합니다. 모세만을 살린 거 아니에요. 용비어천가와 같은 신화를 만들면 안 돼요.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기 위해서 십브라와 부아를 통해서 모세만을 살린 것이 아니에요. 모든 아이들을 살렸어요.

자기가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여호와 경외 신앙이에요. 산업화와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 인간성의 말살시대라는 거예요.

 

산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넘어가면서 우리가 서양보다 선진국이 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선진국이 되면서도 이 신앙을 고수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돼요.

미국에 유학 가서 미국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지 아니하고 사대주의 사상을 가지고 미국의 잘 사는 것만 가지고 와서 미국의 병패가 우리 속에 그대로 나타난 것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되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우리 학교 현장이 엉망진창이 된 거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신앙이 되려면 여호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있어야 해요. 올바른 여호와 경외 신앙을 위해서는 여호와에 대한 올바른 신관과 경외에 대한 생각을 올바른 생각이 있어야 돼요.

그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면, 하나님이 내 사업 잘 해 주고, 우리 가정에 복을 줄 꺼다. 전부 사기 치는 도깨비 신앙이에요.

경외감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상대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에요. 하나님을 생각하면 내가 암만 노력해도 범접할 수 없는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을 가져야 해요. 매 맞을까 봐 가지는 두려운 감정이 아니에요. 그런 경외감은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느끼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력 있는 인간, 사람이 제대로 되어져요.

교회에서 이런 제자 훈련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런 변화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왜 없는가? 죽은 종교의 설교만 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래서 죽은 유대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말을 했어요?

왕관을 쓰고 왕의 홀을 가지고 눈빛 하나만으로 말 한 마디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하나님이라고 했잖아요? 그런 신앙을 심어주면 교인들이 왜 충성해요? 그 전리품을 받으려고 충성하잖아요.

그런 유대교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보여 주셨잖아요. 우리 한국교회는 신천지 이만희와 같은 하나님을 선포하려고 해요. 이만희가 왜 평화궁전을 지어요? 왜 수십만 명 교인을 모아 놓고 왕의 홀을 가지고 금빛 찬란한 왕관을 쓰고 유유히 걸어가는 퍼포먼스를 왜 해요? “너희들 나를 잘 섬기면 내가 전리품 나눠 줄 게” 이런 거를 노리는 것 아니에요? 오늘 날 이런 것들이 교회에도 얼마나 많이 존재해요?

십자가의 하나님은 로마의 권력에 의해 처형을 당한 하나님이었어요. 유대교의 종교적인 권력 앞에서 처절히 처형당한 하나님이었어요. 못난 하나님이었어요. 누구든지 싫어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그런 초라한 모습에서 창조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영안이 열리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을 때 이보다 더 좋은 예가 없는 거 같아서 반복해요. SK 최태원의 사촌동생이 물류회사를 인수해 가지고 그 회사의 차들을 지입 시키는데 기사 하나가 안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사무실로 불러 올려가지고 자기보다 10살이나 많은 그 사람을 엎드려뻗쳐 시켜 가지고, 야구방망이로 때리면서 한대 100만 원이다. 100만 원짜리 수표 20장을 던져주고 20대 때렸잖아요!

매 맞는 그 아버지가 얼마나 못난 아버지에요? 매 맞는 아버지의 아들 중에 진짜 아들과 가짜 아들은 이런 거잖아요?

“나는 우리 아버지와 같이 저렇게 안살아!” 이러는 아들은 아버지를 아는 진짜 아들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아버지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지요. 뭐만 보이는 가?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아버지가 보이는 게 아니고 돈만 보이는 거지요.

반면에 “우리 아버지가 자기보다 나이 한참 어린 사람에게 엉덩이를 내밀고 맞아 할 이유가 없는데, 저렇게 맞은 돈을 가지고 내가 공부 했구나! 저렇게 맞은 아버지의 모멸감으로 내가 먹었구나! 내가 입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아들도 있지요.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본질을 보는 영안이 열린 자식이지요. 그 자식이 효도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것도 못 해주는 하나님이야?” 이런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은 전부 이만희 같은 하나님이나, 유대교가 섬겼던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사회가 황폐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로마의 권력에 굴복 당하여 처절히 처형을 당한 것은,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로마의 권력에게, 입김 하나로 날려 버릴 수 있는 유대교의 종교적인 권력에 굴복하고, 처형을 당한 것은, 나를 위해서, 나, 사람 되라고... 인간은 가진 돈이나, 스펙을 가지고 가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그래서 내가 사는 세상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고, 정글이 되지 않도록 그랬구나! 이런 깨달음은 성령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영안이 안 열리면 모르는 거요. 설명해 줘도 몰라요.

아버지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최신식 스마트 폰이 눈에 보이는 자식에게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지요. 남들보다 부자가 되고 싶고, 자기 자녀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속에 그 하나님이 들어올 리가 없으니까, 왕관을 쓴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선포하는 거예요. 내가 설득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버이 주일에 부모에게 효도해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가정 제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교회에서 알아야 돼요. 영적인 가족인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로마의 권력에 의해서 처형당한 하나님, 유대교의 종교적 권력 앞에 말 한마디 못 하고 굴복 당하신 하나님!

왜? 나, 사람 되라고...

최태원의 사촌 동생 앞에 매 맞는 아버지가 왜 맞아요? 아들 입에 풀칠 해주려고, 아버지 자기 먹고 입기 위해서는 그리 안 하겠지요?

이런 하나님, 이런 아버지를 말하지 않으니 경외감이 안 생기는 거요.

그런 행동은 어떤 자식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부모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에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행위에요.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행위에요. 그 행위를 일컬어 아카페라 하는 거요.

 

어버이주일에 카네이션을 못 달아드린 것만 안타까워하지 말고, 용돈을 적게 드린 거 아까워하지 말고, 정말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에게 효하는 마음이 있는가? 돌아 봐야 돼요.

우리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되었는가? 여러분 그런 하나님 앞에서 경외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카네이션을 드리고, 용돈 드리고, 선물 사 드리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 효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꽃으로 퉁 칠 생각하지 마라. 이런 플랜카드를 보면서 슬퍼요. 내 부모님은 그런 부모님이 아니었거든요. 꽃만 받고 끝내기에는 내가 너를 정성으로 키웠다. 이러는 부모님이 아니었어요.

자식에게 늘 미안해하신 부모님이었어요. 여러분 제가 부모님에게 뭐 좀 해 드리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은 뭐라 했는가? “나는 괜찮다. 너희들끼리나 잘 살아라!” 그러셨어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여러분들이 교회에 뭐 바치라고 하지 않아요. 금도 은도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뭐가 필요하겠어요. 종교인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해라.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준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고 너희들 생명을 주려고 해라.” 하십니다.

교회에 왜 다녀요? 복 받으려고요? 종교적인 사기에 넘어가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생명을 주려고 다녀야지요. 누구에게 생명을 주어야 해요? 하나님에게가 아니고 내 옆에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고 해야 해요. 그게 생명이에요.

왜 우리나라가 서양보다 선진국이 되어야 되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생명 주려고요. 이거 놓쳐버리면 암만 잘 살아도 황폐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왜 이런 말을 해요?

유대교가 그랬거든요? 유대인들은 자기 소득의 일정 부분을 부모에게 효도비를 드려야 되요. 그런데 부모에게 상처받은 자식이 부모님에게 드리기 싫거든요.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불효한 것을 후회하는 자녀에게, 유대교는 그런 마음을 이용해서 부모에게 줄 돈을 회당에게 바치면서 고르반이라고 하면 부모에게 한 것과 같다고 한 거에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나누어 줄 것을 가지고 교회에 십일조로 퉁 치려고 하는 것은 죽은 종교에요.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 그런 모습 많잖아요.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쟁이들은 예수와 하나님만 보이냐?”

“부모는 안 보이고, 형제를 안 보이냐?”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요. 맞는 말이에요. 한국교회가 죽었기 때문에 듣는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우리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하잖아요. 십의 일은 교회에 바치고, 십의 일은 부모와 형제에게 나누어 주고, 십의 일은 친구와 사회에 유익하게 쓰고, 십의 칠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멋지게 사용하라고 하잖아요.

왜 그렇게 못 사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가 그런 삶을 살기에는 너무나 개인이 책임질 일이 많기 때문이지요.

오늘도 여러분들의 소득에서 그리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회개하세요. 적은 부분이나마 그렇게 살려고 해야 돼요.

 

그리고 한국교회는 장자의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왜 장자가 되려고 해요? 더 많은 복을 받으려고...

천만에요. 그런 사람이 장자가 되면 큰일 나요. 장자 교단이라고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더 많은 유산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 말을 들으세요.

죄송하지만 여호와 경외 신앙이 내 속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자녀교육도 이렇게 시켰어요. 우리 아이들 세 명 중에 어릴 때 제일 맏이에게 돈을 줘서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게 했어요. 어릴 때는 동생들의 불만이 많았어요. 저에게 직접 달라고... 그래도 제일 맏이가 나누어 주게 했어요.

장자로서 역할을 하라고 그랬어요. 그 이유는 맏이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그 책임감에는 희생정신이 수반되거든요.

그런데 크고 나니까요. 모든 아이들이 감사해요. 맏이가 책임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책임감을 가지는 사람은 희생하게 되어 있어요. 희생이 없는 책임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교회 장로님들은 장자에요. 누구보다 책임감을 가져야 돼요. 그 책임감이 있느냐 없느냐는 다른 교인들 보다 희생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평가 되는 거요. 왜 없는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우리 아들이 장가를 가는데, 저는 하나님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십의 칠을 나를 위해서 쓰는 사람이니까, 안 모아요. 목돈 들어 갈 일이 생겼는데 걱정이었지요.

그런데 맏이가 은행 퇴직금을 내 놓을 테니, 둘째 보고 너도 내놔라 해서 둘이 수천만 원씩 내서 인천 송도에 아파트 전세를 동생에게 해 준 거야. 어버이날 저에게 용돈을 안 줘도 너무 행복해요. 여러분들 가정에서 자녀를 그렇게 키우세요.

 

우리가 세상의 장자입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그만큼 헌신해야 돼요. 그래야 세상이 좋아져요. 맏이도 미래가 걱정 안 되겠어요?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니 할 수 있어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뭘 드리려고 할 때에, “나는 됐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합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카네이션을 드리고, 뭘 드리려 할 때에 “나는 됐다. 너희들끼리 잘 살아라.”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 교회에서 목회해요. 여러분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려고 하세요.

그런 사람이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은, 아버지가 왜 매 맞는가? 깨달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것도 하나도 못 해 줄 거면서 왜 날 낳았어?” 이런 생각을 하는 자녀는 부모의 본질을 모르는 자식이지요. “왜 아버지가 자존심 숙여가며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엎드려뻗쳐 해서 매 맞으면서 회사 다니고, 사업 하는 가? 자기 먹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식 입에 맛있는 거 사주려고 그랬구나?” 깨달을 때 진짜 자식이 되는 거요.

하나님의 진짜 백성은 왕관을 쓰고 왕의 홀을 가지고 백마를 타고 나타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착각의 우상이에요.

로마의 권세 앞에서 처절히 처형을 당하고, 유대교의 종교적 권력, 한 점도 안 되는 그런 힘을 가진 자들에게 전능하신 그 분이 무릎을 꿇은 것은 우리가 사람 되라고 그런 거에요.

 

왜 한국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는 거야? 이 신성한 강단에서 우상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는 금송아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구유의 주님, 십자가의 주님을 선포하는데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어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시기에 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지요. 창조자이기에 그랬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지요.

누가 그런 삶을 살아요? 낳은 자이기에... 부모님이 그런 분이신 것을 아는 자이지요.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하니라. 이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요

한국의 교인들이 믿음을 배반하고 불신자보다 악하기 때문에 세상이 변하지 않아요. 코로나 19를 보면서 산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넘어오면 우리나라가 틀림없이 서양보다 앞서가게 될 거요.

그 앞서가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그 앞서 가는 것에 대해서 좋아하지 말고요. 여호와 경외와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대해서 변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경제적인 선진이 우리 삶의 진정한 부유함이 되는 그런 우리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그런 목사들이 한국 교회의 목사가 되도록 신학교가 좀 정비 되도록 기도하시고요. 태평양 건너갔다 와 가지고 안수 받는 그런 목사 말고요. 3년 신학을 했다고 다 된 것 같이 생각하지 말고요.

왜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가? 하는 것을 아는 생명을 아는 목사들이 많아져야 될 거 같아요. 그래서요 목사가 되는 것이 두려워 도망가고, 도망가고 하다가 돼야 되는 거예요.

 

“도움도 안 되는 재난 구호금을 줘서 국고를 낭비하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부하면 돼요.

그런 생각이 들 때 비난만 하면서 받아 쓰는 사람이 많아야 나라가 되겠어요? 그런 생각이 들 때 기부 하는 사람이 많아야 나라가 되겠어요.

누가 애국하는 사람이겠어요?

저도 그 돈 없어도 살겠더라고요. 그래서 절반은 국가를 위해서 기부하고, 절반은 교회에 헌금하기로 했어요.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는 말씀을 왜 하시는지 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세요.

부모님을 공경하세요.

십자가에서 로마의 권력 앞에 유대교의 종교적 권력에 처형당한 하나님!

매 맞는 부모님!

우리가 사람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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